[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6)[강원경제신문-202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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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선중씨(先仲氏) 정약전(丁若銓) 묘지명(墓誌銘)’에서 해당 내용을 인용한다.
“갑진년(1784년) 4월 보름날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우리 형제가 이덕조(李德操)와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물결을 따라 내려오다가 배 안에서 천지조화의 시초와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의 이치에 대해 듣고 황홀하고 놀랐는데 마치 은하수의 끝없음과 같았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정약용이 이벽(李蘗)의 천주교(天主敎)와 관련된 교리(敎理)를 들으면서 깊은 관심(關心)을 보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1770년(영조 46) 9세가 되는 어린 아들을 남겨 두고 모친(母親) 해남윤씨(海南尹氏)가 세상(世上)을 떠나고 그 이듬해인 1771년(영조 36) 정재원(丁載遠)은 금화현(金化縣)에 사는 황씨(黃氏)라는 여성(女性)을 부실(副室)로 삼았으나 요절(夭折)했으며, 그 이후 1773년(영조 49) 서울에 거주하는 잠성김씨(岑城金氏)를 다시 부실로 삼았다.
여기서 한가치 이채로운 점은 정약용이 서모(庶母)인 잠성김씨에 대해 ‘서모김씨묘지명(庶母金氏墓誌銘)’제하의 글을 남겼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서모 김씨(庶母金氏)는 이벽과 같은 해인 1854년(영조 30)생이며, 정약용 보다 8세 연상(年上)이라 할 수 있는데, 본관(本貫)은 잠성(岑城)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歷任)한 김의택(金宜澤)의 딸로서 1773년(영조 49) 정재원의 부실이 되었다.
모친(母親)의 별세(別世) 이후 정약용의 외로움을 달래 주기 위하여 큰 형수(兄嫂)인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정성(精誠)을 다했으나 그에 못지 않게 서모 김씨도 사암(俟菴)을 정성스럽게 보살폈다는 것인데 이러한 내용을 그는 ‘서모김씨묘지명(庶母金氏墓誌銘)’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처음 우리 집에 올 때 용의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다. 머리에 서캐와 이가 많고 또 부스럼이 잘났다. 서모는 손수 빗질해 주고 또 그 고름과 피를 씻어 줬다. 그리고 바지 적삼 버선을 빨래하고 꿰매며 바느질하는 수고도 또한 서모가 담당하다가 장가를 든 뒤에야 그만 두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 자매 중에서 특히 나와 정이 두터웠다.”
위의 글을 통해 서모 김씨가 어린 연령(年齡)에 모친을 잃은 정약용을 마치 친아들 대하듯이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이 강진(康津)에서 유배 생활(流配生活)을 마치고 귀향(歸鄕)한 이후 1813년(순조 13) 세상을 떠난 서모 김씨의 묘소를 용진(龍津)의 산골짜기에서 마현(馬峴) 조곡(鳥谷)으로 개장(改葬)하면서 묘지명을 지었는데, 이런 사실(事實)을 통해 사암이 평소에 정(情)이 많은 인물(人物)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