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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2)[강원경제신문-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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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약용(丁若鏞)의 호()는 다산(茶山)을 비롯해 사암(俟菴), 삼미자(三眉子), 자하도인(紫霞道人), 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 탁옹(籜翁), 열초(洌樵), 균암(筠菴등의 많은 호가 있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1818(순조 18) 강진(康津)에서의 유배생활(流配生活)을 마치고 고향(故鄕마재 마을로 귀향(歸鄕)한 이후 사암이라는 호를 사용(使用)하였다.

 

구체적으로 1822(순조 22) 정약용이 회갑연(回甲宴)을 맞이하면서 파란만장했던 삶을 묘지명(墓誌銘)에 자세히 남겼는데 묘지명이란 망자(亡者)의 생전 행적(生前行跡)을 기록(記錄)한 글을 일컫는 것이나 정약용은 생전에 묘지명을 직접 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묘지명을 지으면서 호를 사암으로 했다는 것인데이는 후세(後世)의 성인(聖人)이 나의 책을 본다 해도 결코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는 당당함과 자신감(自信感)이 묻어 있는 호라 할 수 있다.

 

이제 정약용의 호의 의미(意味)를 생각하면서 사암이 조선(朝鮮)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그 세계(世界)속으로 들어 간다.

 

정약용은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발생한 1762(영조 38) 음력 6 16(양력 8 5사시(巳時현재 오전 11)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숙인(淑人해남윤씨(海南尹氏사이에 3 1녀 중 3남으로 탄생(誕生)하였다.

 

덧붙이면 정약용이 마현리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는 마재에서 탄생하게 된 유래는 5대조가 되는 정시윤(丁時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시윤은 1694(숙종 20)에 발생한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해 서인(西人)들이 재집권(再執權)하게 되면서 남인(南人)들이 타격(打擊)을 받았으나그런 가운데서도 2년 후인 1696(숙종 22)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필선(弼善)으로 제수(除授)됐지만 그 이후 관직생활(官職生活)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狀況)에 고심하게 된 정시윤이 결단(決斷)을 내려 서울을 떠나서 북한강(北漢江)과 남한강(南漢江)이 합해지는 양수리(兩水里.두물머리지역(地域)으로 이주(移住)하니 바로 그 곳이 정약용이 탄생한 마재였다.

 

정약용의 본관은 나주(羅州)로서 8대가 연속적으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해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간 명문(名門)이었으며모친(母親해남윤씨는 윤덕렬(尹德烈)의 딸로서 조선중기(朝鮮中期문신(文臣)이면서 시조 작가(時調作家)로서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오우가(五友歌)’로 유명하였던 고산(孤山윤선도(尹善道) 5대손녀이며또한 시(), (), (등 삼절(三絶)로 명성(名聲)을 떨쳤던 공재(恭齋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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