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여성지도자 강완숙(골롬바) 생애 고찰(5)[강원경제신문-202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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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는 최인길(崔仁吉)이 자신(自身)을 대신하여 순교(殉敎)함으로써 체포(逮捕)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마땅한 처소(處所)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강완숙(姜完淑)의 적극적인 협조(協助)로 그녀의 집 나무광에 머물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조선(朝鮮)의 풍습(風習)을 소개하면 양반 집은 관헌(官憲)의 사찰(査察)과 가택수색(家宅搜索)을 받을 수 없게 되었는데, 더군다나 양반 부녀자가 주인(主人)인 경우에는 외부 남성들이 출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완숙은 이런 요소를 최대한 활용하여 극비리에 주문모 신부를 은신(隱身)시키는데 성공(成功)하였다.
여기서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의 집에 머무르게 된 것과 관련된 일화(逸話)가 있어서 소개한다.
강완숙은 처음에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 나무광에 피신(避身)시키고 가족들도 모르게 3개월 동안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를 가족 몰래 나무광에 머무르게 한 점이 마음에 걸렸으며, 마침내 결단(決斷)을 내려 시어머니께 주 신부가 집에 있는 것을 고백하였다.
강완숙은 시어머니께 “신부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영혼을 구하려고 이곳에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신부님은 피신할 곳도 없습니다. 제가 목석이 아닌 이상 이러한 생각을 할 때에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저는 물론 신부님을 구하기 위해서 제 목숨을 내어놓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시어머니는 체포령(逮捕令)이 내려 있는 주문모 신부를 은신시킨 것이 발각되면 화가 미칠 것을 알면서도 며느리를 믿고 주 신부의 처소를 나무광에서 사랑방으로 이동하는 것을 수용하였다.
한편 강완숙의 의붓아들 홍필주(洪弼周)도 뒤늦게 주문모 신부가 집에 머무르고 있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며, 결국 이러한 일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홍필주는 주 신부의 복사(服事)를 하게 되었다.
강완숙의 결단으로 주문모 신부의 처소가 마련된 이후 그의 존재는 강완숙을 포함하여 몇 사람만 제외하고 극비(極秘)로 하였다.
덧붙이면 당시 조선 사회(朝鮮社會)에서 여성(女性)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만약에 이러한 사실이 당국(當局)에 의하여 알려진다면 강완숙은 생명(生命)의 위협(威脅)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聖職者)를 어떻게 해서든지 지켜내기 위하여 참으로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의 처소에 머무르게 된 이후 가끔 지방(地方)을 방문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였으나, 주 신부의 행방(行方)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유일하게 강완숙뿐이었다고 하니 당시 강완숙에 대한 주 신부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