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 생애 고찰(24)[강원경제신문-20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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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약용(丁若鏞)이 강진(康津)에서 1804년(순조 4)에 완성(完成)한 갑자본(甲子本) 8권을 시작으로 4년에 걸쳐서 다섯 차례 개정(改訂)을 거쳐서 무진본(戊辰本) 24권으로 완성한 주역심전(周易心箋)은 사암(俟菴)이 주역을 주해(註解)한 연구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역심전의 서문(序文)을 정약전(丁若銓)이 지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는데 손암(巽庵)이 정약용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을 인용한다.
“내가 미용(美庸)을 동생으로 둔 것이 어언 44년이나 되었다. 미용은 어려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과거 시험 공부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나는 재치가 번뜩이는 재사(才士)라고 생각했다. 장성하여서는 홍문관(弘文館)이나 규장각(奎章閣)을 드나들면서 문학으로 밝은 임금을 섬기었으므로 내가 문장경술사(文章經術士)라 생각했다.
세상에 나가 정치를 하면서 크고 작은 안팎의 일이 모두 지극한 경지에 나아갔으므로 내가 재상감이라고 생각했다. 만년에 바닷가로 귀양 와‘주역사해’를 지었는데, 나는 처음에는 놀랐고, 중간에는 기뻐하였으며, 끝에 가서는 무릎이 절로 굽혀지는 줄도 알지 못하였으니, 미용을 어떤 부류의 사람과 비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정약전은 정약용이 자신의 동생(同生)이면서도 특별한 인물로 평가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정약용은 상례연구(喪禮硏究)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주나라 고례(古禮)를 고증(古例)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사실 그 고례를 연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약용이 생각한 것이 춘추(春秋)에서 주나라의 고례를 추출하는 것이었므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읽게 됐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그 책에 실려 있는 관점(官占)을 읽게 된 것이 주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됐다.
이와 관련해 정약용이 주역을 최초로 알게 된 시기(時期)는 11, 12세때 부친(父親)이 주역을 읽는 것을 보면서 시작됐으나 그 이후 바쁜 관직 생활(官職生活)로 인해 연구하지 못하다가 비로소 강진에서 연구하게 됐다.
정약용은 주역의 저자인 문왕(文王),주공(周公),공자(孔子) 같은 성인(聖人)들이 백성들을 위하는 선한 뜻에서 어떤 정책(政策)을 실시(實施)하려고 하는데 그 결과(結果)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때 과연 그 일이 하늘의 뜻에 맞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지은 것이 주역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주역 해석(解釋)에 있어서 가장 주안점(主眼點)을 뒀던 부분은 상징(象徵)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공자 같은 성인들이 상징을 취해 주역을 저술(著述)했기 때문이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