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세자 지문〔文孝世子誌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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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세자 지문〔文孝世子誌文〕
세자는 성(姓)은 이(李)이고 휘(諱)는□이니, 금상(今上정조) 전하의 장자이고 영종대왕(英宗大王)의 증손이다. 우리 전하께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아들로 백부인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계가 되었는데, 효장세자를 진종대왕(眞宗大王)으로 추존하였으니 영종대왕의 명이었다.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임인년(1782, 정조6) 9월 7일 인시(寅時)에 창덕궁(昌德宮)의 연화당(讌華堂)에서 세자를 낳았다. 이날 밤 홀연히 한 줄기 붉은 빛이 해가 떠오르듯이 침실을 비추었는데 새벽에 이르러 세자가 탄생하였다. 영종대왕과 우리 전하의 성절(聖節)이 모두 9월이다. 처음에 경희궁(慶熙宮) 뜰 안에 큰 대추나무가 있었는데원종대왕(元宗大王)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그 나무에 말을 매셨다고 한다. 그 뒤에 나무가 말랐는데 현종대왕(顯宗大王) 신축년(1661, 현종2)에 나무가 홀연히 꽃을 피웠고 숙종대왕(肅宗大王)께서 그해 가을에 태어나셨다. 그 후에 나무가 다시 말랐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꽃을 피웠고, 열매가 익자 상께서 근신(近臣)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같은 해 11월에 원자(元子)에 봉하고 상께서 왕비 전하께 명하여 거두어다 아들로 삼았다. 갑진년(1784, 정조8) 8월에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았는데,영종대왕께서 등극하신 연월(年月)이 마침 1주갑(周甲)이었다.을사년(1785) 중양일(重陽日)에 공묵합(恭黙閤)에서 처음 《효경(孝經)》을 공부하였는데, 숙종대왕께서 처음 《효경》을 공부하시던 연월일(年月日)의 2주갑이었다. 병오년(1786) 5월에 홍역을 앓았는데 정상으로 회복했다가 금방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더해져서 11일 미시(未時)에 창경궁의 별당에서 돌아가시니 나이가 겨우 다섯 살이었다.
우리 전하께서는 친히 장례에 임하시어 크고 작은 일에 구애됨이 없이 일체 예법대로 하였으며, 의금(衣衾)을 대내(大內)에서 내어 유사(有司)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의정부에서는 ‘강유상제(剛柔相濟)’와 ‘자혜애친(慈惠愛親)’ 두 시법(諡法)을 취하여 ‘문효(文孝)’라고 시호를 올리고묘호(廟號)는 ‘문희(文禧)’, 묘호(墓號)는 ‘효창(孝昌)’이라고 하였다. 윤7월 19일에고양(高陽)의 율목동(栗木洞)임좌(壬坐) 언덕에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상께서는 현실(玄室)의 지문(誌文)을 신 종수(鍾秀)에게 지으라고 명하시고, 이미 또 어제(御製) 녹지(錄紙)를 써서 내려 주어 글을 짓는 데 자료로 삼게 하였다. 신은 상소하여인현왕후(仁顯王后) 명릉(明陵)의 고사를 따라 어제 녹지를 지문으로 삼도록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으니 삼가 어제 녹지를 놓고 한두 가지 견문을 참고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서술한다.
세자는 자태가 풍만하고 도량이 컸으며, 자애롭고 어질면서 너그럽고 여유로워 인(仁)한 마음이 겉으로 드러났다. 바라보면 숙성(夙成)하고 사려가 깊어 항상 뭔가를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 있는 것 같았으며,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고 세자시강원의 신료들을 대할 때에 한 번도 눈길을 이리저리 돌리지 않았다. 한번은 밤중에 방 안에서 우연히 불이 났는데 모시는 사람들이 모두 잠들었다가 세자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깨어나 불이 더 번지지 않았다. 그때 세자는 태어나서 아직 돌이 되지도 않았다.
책봉(冊封)의 예(禮)를 행하게 되어 뜰에서 막 옥책(玉冊)을 받고서 당에 올라 하례를 받았는데, 남에게 안기거나 부축받지 않고 단정하게 앉았다. 예가 끝나자 상께서 신하들에게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우러러보도록 명하니 신하들이 일시에 섬돌을 올라가 사방을 죽 둘러 에워쌌는데, 세자는 눈길을 주어 두루 살펴보면서 먼 구석에 있는 사람까지 빠뜨리지 않았다. 상께서 웃으면서 “이 아이는 처음 대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수줍어하지 않으니 기이하다.”라고 하셨다. 신하들은 서로 돌아보고 찬탄하면서 “참으로 하늘이 낸 분이다.”라고 하였다.
세자는 태어나서 혜경궁 저하(惠慶宮邸下)에게 양육되었는데 즐거이 따르며 슬하를 떠나지 않았다. 매번 상께서 들어오시면 세자가 반드시 웃으며 맞이하였으며, 발걸음이 문밖으로 나가려 하시면 앙앙 울며 찾았다.
병이 위독해지고 나서 의식이 이미 떠났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두 차례나 전하를 불렀는데, 이때 상께서는 곁방에 거둥해 계셨다. 다음 날 상께서 가 보니 갑자기 기지개를 켜고 눈을 떠 몇 줄기 눈물을 흘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지극한 성품이 죽을 때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말을 배우기도 전에 이미 서적을 좋아하였다. 방 안에 글자를 쓴 병풍이 있었는데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돌아보며 잠시도 곁에서 치우지 못하게 하였다. 어려서 질병이 많았는데 비록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도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간혹 울면서 불편해하는 때가 있으면 주변 사람들은 장난감이 아니라 서책을 가져다주었는데,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千字文)》은 엮은 끈이 손때가 타고 해졌다. 병을 앓게 되었을 때 시험 삼아 서책을 가져다가 펼쳐 보게 하니 마음을 쏟아 자세히 살펴보면서 마치 내용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우리 전하께서 한창 젊으셨을 때 후사가 없어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였는데, 세자가 탄생하자 부녀자들이나 미천한 자들까지 기뻐서 껑충거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민심은 세자의 지위가 확실하게 정해지기도 전에 이미 귀착(歸着)하여 있었다. 또 그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고 상서로운 조짐이 가득 모여정일(精一)의 전수를 이어받고희흡(熙洽)의 운세를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 하늘이 우리나라를돌보아 준것이 우연이 아닌 듯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가엽게 여기지 않고 하루아침에 재앙을 내려서 마침내 세자의 자리를 텅 비게 만들어 종묘의 제사에 주인이 없게 하였는가. 아아, 이 무슨 이치인가.
신은 삼가 생각건대, 세자의 슬기로운 자질은 비록 하늘이 내려 주신 것이지만 한창 어린 나이여서 일상생활하고 밥 먹고 쉬는 것들이 보모(保姆)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아름다운 덕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적었다. 비록 그렇지만 어제의 녹지에 쓰인 600여 글자는 우리 성상의 사령(辭令) 문장이 전모(典謨)에 딱 들어맞는 것으로, 늘 돌보실 때와 집 안에서 같이 생활할 때에 얻은 것이니돈사(惇史)에 비할 수 있다. 타고난 자질의 강함과 부드러움이 법도에 합치한 것은 경대부(卿大夫)들이 바라보고 아는 바이며,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이 천성에 바탕을 둔 것과 서책을 좋아한 것이 거의 양지(良知)와 같은 것은 궁 안의 사람들이 전하며 칭송하는 바이다. 천대 백대 후에 어제 한 편과 시법에 쓰인 여덟 글자를 보면 우리 성상을 닮은 자식이라는 것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아아,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