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 생애 고찰(13)[강원경제신문-2026-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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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1795년(정조 19) 7월 을묘박해(乙卯迫害)에 연루(連累)돼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左遷)된 정약용(丁若鏞)이었지만 현지(現地)에서 주어진 임무(任務)에 최선(最善)을 다했다.
정약용은 금정 찰방으로 재임(在任)하면서 오래전, 부친(父親) 정재원(丁載遠)을 따라 다니면서 직접 목격하였던 농민(農民)들의 모습과 암행어사(暗行御史) 시절(時節) 몸소 체험했던 농민들의 아픔을 다시 한 번 뒤돌아 볼 수 있는 계기라 생각하면서 농민 문제(農民問題)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또한 역속(驛屬)들이 대부분 천주교(天主敎)를 믿고 있어서 정조(正祖)의 뜻에 따라 조정(朝廷)의 금령(禁令)을 전하며 제사(祭祀)를 지내도록 권고했다.
한편 정약용은 이익(李瀷)의 종손(從孫)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에게 편지를 보내어 성호(星湖)의 사상(思想)과 문집(文集)을 정리하는 강학회(講學會)를 열자는 제안(提案)을 했다.
이삼환은 정약용의 제안을 수락(受諾)하여 강학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으며, 사암(俟菴)이 1795년(정조 19) 10월 26일 온양(溫陽)의 봉곡사(鳳谷寺)에 가장 먼저 도착하고 이튿날 이삼환이 도착한 이후 당시 내포 지방의 남인 학자(南人學者)들이 이러한 소식을 알게 돼 목재의 동생인 이명환(李鳴煥)을 비롯해 11명이 참석했으니, 강학회의 참석 인원(參席人員)은 전부(全部) 13명에 이르렀다.
강학회는 11월 5일까지 10여일 동안 계속됐는데 낮에는 이익의 유고(遺稿)를 정리하고 밤에는 학문(學問)에 대해 강론(講論)했는데, 이삼환이 좌장(座長)으로서 질문하면 다른 선비들이 답하고 다른 선비가 모르는 것을 물으면 목재가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또한 이익의 많은 저서(著書)중에서 가례질서(家禮疾書)를 표준(標準)으로 삼아 이삼환이 교정(校正)을 보고 다른 선비들이 이를 필사(筆寫)했다.
이어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설(學說)을 더욱 깊이 연구(硏究)하여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지었는데 이는 퇴계집(退溪集)의 일부를 읽고 느낀 바를 33항목(項目)의 글로 완성(完成)한 것이다.
여기서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의 서문(序文) 일부(一部)를 인용(引用)한다.
[ 을묘년(1795년) 겨울에 나는 금정에 있었다. 마침 이웃 사람을 통해 퇴계집 반부(半部)를 얻었다.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마친 뒤,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 한 편을 읽고 나서야 아전들의 아침인사를 받았다. 공무를 마친 낮에는 그 의미를 부연해서 설명한 뜻을 한 조목씩 수록하여 스스로 깨치고 살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 도산사숙록 이라고 이름했다. ]
이상과 같이 정약용이 금정 찰방으로 재임중에 있었던 행적(行跡)을 정리하였는데 사암(俟菴)은 금정 찰방으로서 본연(本然)의 임무(任務)에 충실(忠實)하면서도, 평소 흠모(欽慕)하던 이황의 문집(文集)을 읽고 느낀 바를 쓴 ‘도산사숙록’을 완성하고 이익의 정신(精神)을 계승(繼承)하는 강학회에 참석(參席)함으로써 유학자(儒學者)로서의 면모(面貌)를 유감없이 발휘(發揮)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