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토마스 모어경과 강완숙 생애 비교 고찰[브레이크뉴스-2017-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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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브레이크뉴스에 그동안 다양한 분야의 칼럼을 발표하였지만 본 칼럼은 처음 다루어 보는 주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브레이크뉴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글에도 토마스 모어경과 강완숙(姜完淑)의 생애를 비교한 글은 발견하지 못하였으니 이런 분야로서는 최초의 시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토마스 모어경과 강완숙은 여러 면에서 볼 때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국적(國籍)이 토마스 모어경은 영국(英國)이며, 거기에 반하여 강완숙은 조선(朝鮮)이라는 것인데, 더불어 생존연대로 볼 때도 토마스 모어경이 순교한지 230여년 지나서 강완숙이 출생하였으니 그 차이가 200년이 넘는다는 것이다.
또한 남성과 여성이라는 측면도 하나의 차이라 볼 수 있는데 토마스 모어경은 1535년 순교할 당시 대법관(大法官)이라는 최고위직(最高位職)에 있었다는 것이며, 거기에 반하여 강완숙은 1801년(정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당시 순교할 때 한국천주교 최초의 여성회장(女性會長)이라는 직책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토마스 모어경과 강완숙의 차이점을 간략히 살펴 보았는데 그렇다면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로 토마스 모어경과 강완숙은 국적을 초월하여 순교자(殉敎者)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여 국적을 비롯하여 성별과 직책을 초월하는 순교자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서 말하는 순교자라는 의미는 토마스 모어경과 강완숙은 같은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을 수호하기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희생하였다는 것이다.
토마스 모어경의 입장에서 헨리8세의 수장령(首長令)에 찬성만 하면 얼마든지 생명을 보존하고 평신도로서 대법관의 직책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지만 평소 가톨릭 교리에 대한 확고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던 토마스 모어경은 그 반대의 길을 택하면서 향년(享年) 58세를 일기(一期)로 런던 힐 타워에서 참수형(斬首刑)으로 순교의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수장령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한다면 헨리8세가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시녀인 앤 불린과의 혼인을 승인하여 줄 것을 당시 클레멘스7세 교황에게 요청하나 교황이 이를 거부하자 로마가톨릭교회에서 독립하여 영국에 독자적인 가톨릭교회를 창립하니 이것이 오늘날 성공회(聖公會)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강완숙은 당시 여성들이 권리를 거의 행사하지 못하던 조선시대에서 한국천주교 최초의 여성회장이라는 중책을 수행하였으니 이 또한 평범한 일이 아니거늘 더군다나 목숨을 걸고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의 생명을 지켰으니 이는 토마스 모어경이 생명을 걸고 가톨릭 신앙을 수호한 것에 비견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강완숙도 결국 신유박해 때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니 만약에 여성으로서 혹독한 고문에 이기지 못하여 다른 선택을 하였다면 순교가 아닌 유배로 변경될 수도 있었으나 강완숙도 토마스 모어경 같이 생명을 포기하고 순교의 길을 선택하였으니 이 어찌 장엄한 광경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토마스 모어경은 순교한지 정확히 400주년이 되는 1935년 5월 19일 로마 교황청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요한 피셔 주교와 함께 비오 11세 교황에 의하여 성인품(聖人品)의 반열(班列)에 올려졌다.
이와 더불어 강완숙도 순교한지 213년이 되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미사집전으로 거행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순교자 ”시복식(諡福式)에서 복자품(福者品)의 반열에 올려졌다.
거슬러 올라가서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인 1980년 5월 24일 경주 수학여행 마지막 날에 영세(領洗)를 하기 위하여 홀로 상경하여 절두산 성당에서 토마스 모어를 주보성인으로 영세하면서 깊은 인연이 시작되었다.
생각하여 보니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주보성인(主保聖人)의 의미가 무엇인지 크게 와닿았지 않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2015년 9월 21일“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경 순교 480주년 추모” 제하의 칼럼을 발표하면서 토마스 모어경을 세상에 알렸다.
또한 그로부터 2년 후인 2017년 7월 14일 “조선후기 여성선각자 강완숙(골롬바) 순교 216주년 추모”제하의 칼럼을 시작으로 7회에 걸쳐서 연재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필자가 영세한 절두산 성당도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던 유서 깊은 성지(聖地)이니 이런 것을 보면 필자의 인생이 순교자들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제 본 칼럼을 마치면서 필자의 주보성인이 토마스 모어경이라는 점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면서 더불어 강완숙의 생애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을 보람있게 생각하며, 앞으로 한국천주교회사(韓國天主敎會史) 연구(硏究)에 혼과 정성을 다할 것이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 역사작가.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저자.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