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8)[강원경제신문-202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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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이익(李瀷)은 이잠(李潛)의 죽음을 보면서 근본적으로 정치(政治)에 회의(懷疑)를 느끼고 평생 관직 생활(官職生活)을 하지 않기로 결심(決心)하였으며, 그 이후 초야(草野)에 은거(隱居)하면서 성호사설(星湖僿設)을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필자(筆者)가 이익(李瀷)의 생애(生涯)를 소개(紹介)한 배경(背景)은 정약용(丁若鏞)이 당시 시대적(時代的)인 상황(狀況)으로 볼 때, 권철신(權哲身)같이 성호(星湖)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한 것은 아니지만 이가환(李家煥)을 통해 성호의 유고(遺稿)를 읽은 것이 강력한 동기부여(動機附輿)가 되어 성호를 사숙(私淑)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숙이란 어떤 인물(人物)에게 직접 가르침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 인물이 남긴 생전(生前)의 글을 공부하면서 그 가르침을 흠모(欽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이익을 사숙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5세에 결혼을 하자 마침 아버지께서 다시 벼슬을 해 호조좌랑이 되셨으므로 서울에서 셋집을 내어 살게 됐다. 이때 서울에는 이가환(李家煥)공이 문학으로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李承薰)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약용(若鏞)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읽고 혼연히 학문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덧붙이면 정약용은 이익의 종손(從孫)인 이가환로부터 성호가 생전(生前)에 남겼던 유고(遺稿)를 전달받고 읽는 과정(過程)에서 그 사상(思想)을 깊이 흠모(欽慕)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 평생 성호를 사숙(私淑)하기에 이르렀다.
영조(英祖)에 이어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 정조(正祖)가 22대 임금으로 즉위(卽位)한 1776년(영조 52) 정약용은 동갑(同甲)이 되는 홍화보(洪和輔)의 딸과 혼인(婚姻)했는데, 사암(俟菴)의 장인(丈人)이 되는 홍화보의 본관(本貫)은 풍산(豊山)으로 본래 무과 출신(武科出身)으로서 장연 부사(長淵府使)와 무인(武人)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승지(承旨)를 역임(歷任)하였던 인물(人物)이었다.
특히 홍화보는 병법(兵法)에 조예(造詣)가 깊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훗날 정약용이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를 저술(著述)하는데 영향(影響)을 주었다.
한편 1777년(정조 1) 정재원(丁載遠)이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부임(赴任)하게 돼 정약용이 따라 가게 됐으며, 1778년(정조 2) 동림사(東林寺)에서 정약전(丁若銓)과 함께 공부했는데 이 절은 화순현 북쪽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