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 생애 고찰(26)[강원경제신문-202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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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약용(丁若鏞)이 정학초(丁學樵)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것을 정약전(丁若銓)에게 보낸 편지(便紙)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한다.
“학초가 지난 경신년 겨울에 독서하는 걸 보고서 큰 그릇의 사람이 될 것을 벌써부터 알았습니다. 올봄에는 그 애가 물어온 몇 가지 조목을 보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였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금년 가을에 이곳으로 데려와서 겨울동안 가르치고 내년 봄에는 형님 곁으로 들어가서 모시고 있다가 4월이나 5월쯤에 돌아간다면 그 애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정약용은 정학초를 강진(康津)으로 불러 직접 가르칠 마음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청천벽력(晴天霹靂) 같은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가 불과 17세가 되는 1807년(순조 7)에 병으로 인해 세상(世上)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정약용은 정학초의 묘지명(墓誌銘)을 통해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내가 유락한 이래로 저술한 육경(六經), 사서(四書)에 관한 학설(學說) 2백 40여권을 학초에게 전하려 하였더니 이제는 그만이로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정약용은 강진에서 저술(著述)한 육경(六經)을 비롯하여 사서와 관련된 240권에 이르는 책을 정학초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였는데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난 연유로 현실(現實)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힌편 정약용은 1808년(순조 8) 다산(茶山)으로 처소(處所)를 옮긴 이후 제자(弟子)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귤동의 윤씨 가문(尹氏家門)의 후손(後孫)들이 중심(中心)이 됐는데 사암(俟菴)에게 처소를 제공해 주었던 윤단(尹慱)의 손자(孫子)가 6명이 포함(包含)됐다.
정약용은 다산에서 거주한 이후 심신(心身)의 안정(安定)을 찾았으며, 18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 활동(著述活動)도 병행(竝行)하면서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모든 저서(著書)의 대부분을 다산 초당(茶山草堂)에서 저술했다.
여기서 강진읍에서 가르쳤던 6명의 제자와는 별도로 다산으로 이주(移住)한 이후 가르쳤던 18명의 제자 명단을 소개한다.
"이유회(李維會), 이강회(李綱會), 정학가(丁學稼), 정학포(丁學圃), 윤종문(尹鍾文), 윤종영(尹鍾英), 정수칠(丁修七), 이기록(李基祿), 윤종기(尹鍾箕), 윤종벽(尹鍾壁), 윤자동(尹玆東), 윤아동(尹我東), 윤종심(尹鍾心), 윤종두(尹鍾斗), 이택규(李宅逵), 이덕운(李德芸), 윤종삼(尹鍾參), 윤종진(尹鍾軫)"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