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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 생애 고찰(10)[강원경제신문-202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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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1792(정조 16) 4월 정약용(丁若鏞)의 부친 정재원(丁載遠)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재임(在任중에 임소(任所)에서 세상(世上)을 떠났는데사암(俟菴)은 형제(兄弟)들과 함께 5월에 관()을 모시고 충주(忠州하담(河潭선영(先塋)에 장사(葬事)지내고 마현의 가묘(家廟)에 혼백(魂魄)을 모셨다.

 

정조(正祖)는 정약용이 부친상(父親喪)으로 3년 시묘 생활(侍墓生活)을 하는 과정(過程)에서 자주 안부(安否)를 물어 보면서 사암에 대한 각별한 신임(信任)을 보여 주었는데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해당 내용(內容)을 인용(引用)한다.

 

그런데 이 해 겨울에 수원에 성을 쌓는데 임금이 말씀하시기를기유년(1789겨울에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놓을 때 약용이 그 방법을 아뢰어 주어 일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그에게 명해 집에 있으면서 성을 쌓는 방법을 조목별로 올려 바치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윤경(尹耕)의 보약(堡約)과 류성룡(柳成龍)의 성설(城說)에서 도움을 받아 그중에서 좋은 방법을 따다가 초루(譙樓), 적대(敵臺), 현안(懸眼), 오성지(五星池)의 여러 방법을 이치에 맞게 밝혀 임금께 올렸다.

 

임금은 또 내각에 있는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보내 무서운 물건을 끌어 올리고 세우는 인중기중(引重起重)의 방법을 강론하도록 하셨기에 내가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리고 활차(滑車)와 고륜(鼓輪등을 써서 작은 힘으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수 있게 했다.

 

성 쌓는 일을 끝마쳤을 때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다행히 기중가(起重架)를 사용해 4만냥의 비용을 절약했다고 하셨다.“

 

위와 같은 내용을 통해 부친상으로 3년간의 시묘 생활을 하는 정약용에게 정조가 화성(華城)의 건축(建築)과 관련된 일을 지시(指示)하고 또한 내각(內閣)에 있는 도서집성과 기기도설을 내려 보낸 모습을 보면서 당시 사암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어느 정도로 각별하였는지 여부를 짐작할 수 있다.

 

1794(정조 18) 7월에 정약용은 시묘 생활을 마치고 다시 조정(朝廷)으로 복귀(復歸)해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제수(除授)됐으며, 8월에는 비변사(備邊司)의 낭관(郎官)을 맡고 10월에 다시 홍문관(弘文館)으로 들어가 교리(校理), 수찬(修撰)이 됐다.

 

한편 정약용은 그 해에 정조(正祖)의 어명(御命)으로 경기도 암행어사(京畿道暗行御史)로서 적성(積城), 마전(麻田), 연천(漣川), 삭녕(朔寧지역(地域)에 파견(派遣)됐으나 그 이듬해에 발생(發生)한 을묘박해(乙卯迫害)에 연루(連累)돼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左遷)됐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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