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생애 고찰(12)[강원경제신문-202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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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약용(丁若鏞)이 을묘 박해(乙卯迫害)에 연루(連累)돼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左遷)된 사실을 11회에서 소개(紹介)했는데, 을묘박해가 일어나기 전에 사암(俟菴)이 어떤 행적(行跡)을 보였는지 살펴본다.
정약용은 1794년(정조 18) 정조(正祖)의 어명(御名)에 의해 경기도(京畿道) 암행어사(暗行御史)로서 적성(積城),마전(麻田),연천(涎川),삭녕(朔寧) 지역(地域)에 대한 감찰 임무(監察任務)를 수행(遂行)한 이후 그 해 12월 상호도감(上號都監)의 도청랑(都廳郞)으로 제수(除授)되었다.
이어서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가 됐다가 그 이듬해 정월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이 되었으니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신임(信任)이 어느 정도 각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약용은 또한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됐는데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로서 사암이 비로서 당상관(堂上官)의 반열(班列)에 오른 것을 의미(意味)했다.
1795년(정조 19) 2월 정약용은 동부승지에서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옮겼는데, 정조가 사암을 병조 참의로 제수한 이유는 수원(水原) 화성(華城)에서 열릴 예정(豫定)인 왕실 행사의 (王室行事)의 호위(護衛)를 사암에게 일임(一任)하기 위하여 내린 파격적(破格的)인 조치(措置)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화성에서 열릴 왕실 행사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행사인지 소개한다.
1795년(정조 19) 윤 2월 9일부터 2월 16일까지 8일에 걸쳐서 정조가 수천명의 수행원(隨行員)들의 호위 속에 한양 도성(漢陽都城)을 떠나서 화성 행궁(華城行宮)에 머물렀는데 이러한 8일 동안의 일정(日程)을 기록(記錄)으로 남긴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라 할 수 있다.
정약용이 이러한 왕실의 핵심 행사에 호위 책임자(責任者)가 됐다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사암에 대한 정조의 신임(信任)이 대단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윤2월 13일 화성 행궁 봉수당(奉壽堂)에서 열렸던 정조의 모친(母親)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회갑연(回甲宴)이라 할 수 있었다.
정조는 왕실 행사를 성대하게 마친 이후 정약용에게 의궤청(儀軌靑) 찬집 문신(纂輯文臣)으로 제수(除授)하여 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考)를 찬술(撰述)하라고 명했는데 이는 화성 축조(華城築造)에 대한 종합 보고서(綜合報告書)를 의미했다.
한편 정조는 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던 채제공(蔡濟恭)을 좌의정(左議政)으로 제수한 것을 비롯해 이가환(李家煥)을 공조판서(工曹判書),정약용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제수했으니 이 시기(時期)가 남인(南人)들의 전성기(全盛期)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남인들이 을묘 박해로 타격을 받으면서 결국 사암도 금정 찰방으로 좌천되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