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여성지도자 강완숙(골롬바) 생애 고찰(6)[강원경제신문-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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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강완숙(姜完淑)의 처소(處所)는 사제(司祭)가 거처하는 곳이 되었으므로 사실상의 본당(本堂)이면서 동시에 사제관(司祭館)의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는 놀랄만한 인내심과 근면함을 발휘하여 많은 업적(業績)을 남겼는데, 낮에는 우리말 공부와 서적번역(書籍飜譯), 밤에는 성무(聖務)를 집행(執行)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론 대외적인 사목활동(司牧活動)의 차원에서 내포(內浦)와 전주(全州)를 방문하였다.
또한 그는 신자들의 교육과 신앙 향상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그러한 결과 명도회(明道會)라는 신심 단체(信心團體)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평신도사도직협의회(平信徒使徒職俠義會)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다.
명도회는 교리 연구(敎理硏究)와 더 나아가서 전파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으며, 주문모 신부는 초대 회장(初代會長)에 정약용(丁若鏞)의 형으로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하였으며,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서소문밖 형장에서 장렬히 순교(殉敎)하였던 정약종(丁若鍾)을 임명하였다.
한편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은신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강완숙은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사목 활동(司牧活動)을 보좌하고 교회 운영(敎會運營)에 필요한 사무를 수행하였다.
이것은 당시 조선 사회(朝鮮社會)에서 여성(女性)이 이런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자체가 참으로 이례적인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으니,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도 강완숙은 당시 시대(時代)를 앞서간 여성 지도자(女性指導者)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강완숙은 넓은 견문(見聞)과 출중한 언변(言辯)을 통하여 많은 부녀자(婦女子)들에게 교리(敎理)를 가르치고 입교(入敎)까지 시켰으니 오늘날로 말하면 선교사(宣敎師)의 역할까지 겸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강완숙은 이와 같이 여성 회장(女性會長)으로서 적극적인 전교 활동(傳敎活動)을 통하여 다양한 계층을 입교시키는데 기여를 하였는데, 특히 왕족(王族)이었던 정조(正祖)의 이복 동생(異腹同生) 은언군(恩彦君)의 아내 송씨부인(宋氏夫人)과 그 며느리 신씨부인(申氏夫人)까지 입교시켰던 점을 주목한다.
덧붙이면 왕족인 송씨부인과 신씨부인이 입교하게 된 시대적 배경(時代的背景)은 은언군이 1786년(정조 10) 그의 아들 상계군(常溪君)이 역모(逆謀)를 하였다는 죄명(罪名)으로 독살(毒殺)되자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같은 해 12월 28일에 강화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이 무렵, 폐궁(廢宮)이었던 경희궁(慶熙宮)에 송씨부인과 신씨부인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강완숙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주문모 신부를 수행하여 결국 두 왕족에게 마리아라는 세례명(洗禮名)을 받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강완숙의 활동과 관련해 눈여겨 볼 대목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入國)할 당시인 1795년(정조 19)년만 하더라도 신자수(信者數)가 4천명 정도였으나, 5년후에 두배가 되는 1만명으로 증가하였다는 것이니, 이렇게 신자수가 증가한 배경에 강완숙의 열정적인 전교 활동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