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여성지도자 강완숙(골롬바) 생애 고찰(7)[강원경제신문-2025-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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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6회에서 천주교 신자(天主敎信者) 가 증가한 요인중의 하나를 강완숙의 열정적인 전교 활동(傳敎活動)이 영향을 주었다고 소개하였다.
그런데 또 하나의 요인이 있으니, 시기가 정조(正祖)의 재위 기간(在位期間)이었다는 점인데, 타고난 성품(性品)이 온후하고 비교적 천주교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것도 신자수가 증가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 정조의 입장에서 볼 때 천주교 반대 세력(反對勢力)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불가피하게 적극적인 신자 몇명에게 사형(死刑)을 내리는 조치(措置)를 취하였다.
또한 1795년(정조 19)에 강화도 사고(江華島史庫)에 보존하고 있던 서학(西學)에 관한 책 26종을 서울에 가져다가 없앴으니, 이는 서학 문제(西學問題)로 인하여 더 이상 반대파(反對派)들에게 탄압(彈壓)할 수 있는 명분(名分)을 주지 않기 위한 정조 나름대로의 고육책(苦肉策)이었다.
비록 정조 재위 기간에 발생한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인하여 윤지충(尹持忠)을 비롯하여 권상연(權尙然),권일신(權日身) 등이 순교(殉敎)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규모는 크지 않았다다.
그러나 참으로 비통하게도 조선(朝鮮)의 르네상스를 구현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보였던 정조가 1800년(정조 24) 6월 28일 향년(享年) 49세를 일기(一期)로 승하(昇遐)하면서 정국(政局)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랑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한편 천주교 4대 박해는 신유박해(辛酉迫害,1801년)를 비롯해 기해박해(己亥迫害,1839년),병오박해(丙午迫害,1846년),병인박해(丙寅迫害,1866년)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 을사박해(乙巳迫害,1785년),신해박해(辛亥迫害,1791년)나 을묘박해(乙卯迫害,1795년)가 있기는 하였으나 규모가 크지 않았기에 4대 박해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덧붙이면 신유박해가 발생한 시점이 1801년(순조 1)이라는 것인데, 이 시기는 정조에 이어서 순조(純祖)가 즉위(卽位)한 이듬해가 되며, 사실 그 이전해인 1800년(정조 24) 12월 17일에 최필공(崔必恭)이 체포(逮捕)되면서 신유박해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공식적(公式的)으론 1801년(순조 1)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순조가 즉위할 무렵에 연령(年齡)이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영조(英祖)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한 이후부터 천주교 탄압의 분위기가 형성(形成)되었다는 것인데, 구체적인 징표(徵表)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하면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천주교 탄압의 명분이 되었던 오가작통법에 대하여 거론하기 전에 그러한 법을 시행한 정순왕후는 어떤 인물(人物)이었는지 살펴 본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