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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동(栗洞)의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소개한다[문암 역사작가의 보금자리-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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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에 차관으로 빌린 1,300만원을 갚기 위해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을 실시한 국권회복운동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 사장 서상돈과 부사장 김광제의 발의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하여 범국민적인 모금 운동을 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실시된 1907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2년후로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으며, 특히 헤이그 특사 사건이 발생한 해이기도 하다.


덧붙이면 헤이그 특사 사건이란 고종황제의 밀명에 의해 이준을 비롯해 이상설,이위종 특사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전세계에 호소하려다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이후 이준 열사가 현지에서 장렬히 순국한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순종황제가 즉위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과정에 연천도 전지역에서 동참하기에 이르렀는데, 그중에 연천 동면 상리 율동에 거주하는 백성들도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


당시 황성신문 1907년 8월 7일자 기사에는 동참한 인물들의 리스트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윤자택 종중 3환


*김응련 1환


*이경하 박승석 이범인 각 50전


*이근호 이석로 이근태 각 30전


*박승주 홍시연 홍대양 각 20전


*남계운 10전


*합 7환 30전


이를 정리하면 율동의 백성들이 모금한 총 액수가 7환 30전이라는 것인데, 현재의 금액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인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우나 거액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모금 운동에 가장 많은 자금을 의연한 인물이 윤자택 종중으로 나오는데 종중 차원에서 참여한 것으로 볼 때, 파평윤문의 여러 인물들이 동참한 것으로 짐작되지만 윤자택 이외의 성명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두번째로 많은 자금을 의연한 인물이 김응련인데, 1환이라는 것인데, 개인이 이 정도의 자금을 의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세번째는 개인이 아니라 형제가 자금을 의연하였다는 점이 특이하게 느껴 지는데, 박승석 박승주 형제가 각각 50전과 20전을 의연하였다는 것이다.


그이외 다른 인물들도 자금을 의연하면서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는 것이다.


필자가 밝혀내지 못한 대목은 처음에 어떤 계기로 율동의 백성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인지 그 내력을 규명하지 못한 것인데, 이는 앞으로 밝혀야 할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이제 2027년이면 국채보상운동이 발생한 지 120주년이 되는데, 간지로 보면 2주갑에 해당되는 해가 되기에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현재는 연구의 시작 단계이나 앞으로 율동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전모를 밝힐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2026년 9월 9일(수) 문 암 올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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