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 생애 고찰(27)[강원경제신문-2026-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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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약용(丁若鏞)이 강진(康津)에서 유배 생활(流配生活)중이던 1814년(순조 14) 약암(約菴) 이재의(李在毅)의 아들 이종영(李鍾英)이 영암 군수(靈巖郡守)로 재임 중에 있었는데 약암이 사암(俟菴)이 강진에서 유배중인 사실을 알게 되어 다산(茶山)으로 직접 찾아가서 만났다는 것이니 그 열정이 대단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이재의의 가문(家門)을 간략히 소개한다면 본관은 전주(全州)로서 증조부(曾祖父) 이주국(李柱國)은 정조(正祖)의 신임을 받아 어영 대장(御營大將)을 비롯하여 훈련 대장(訓練大將), 좌우 포도 대장(左右捕盜大將),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했다.
덧붙이면 이재의도 진사시(進士試)까지는 합격했으나 대과(大科)는 응시하지 않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여행 다니면서 주역(周易)에 심취했다.
이재의는 노론(老論)이기에 당시의 사회 풍토(社會風土)로 볼 때 전혀 당색이 다른 남인(南人) 출신의 학자(學者) 정약용을 만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러한 당파적인 문제를 초월하여 같은 학자의 입장에서 대화를 하고 싶어 사암을 만났다고 하니 이 또한 특별한 인연(因緣)으로 생각한다.
정조의 최측근이었던 정약용이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인해 유배의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혀 생각지 않았던 노론계(老論係) 학자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다산(茶山)까지 직접 왔으니 내심 놀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정약용과 이재의가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약암이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하루밤 묵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대화(對話)가 잘통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정약용이 1762년(영조 38)생이고 이재의가 1772년(영조 48)생이니 연배 상으로 볼 때 사암이 약암보다 10세 연상이라 할 수 있는데 두 학자의 인연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정약용은 이재의의 아들인 이종영에게 서간(書簡)을 보내어 목민관(牧民官)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길에 대하여 설명하기도 하였으니 두 학자간의 우정(友情)의 깊이가 어떠하였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정약용은 이재의와 여러차례 서간(書簡)을 교환(交換)하면서 그 인연을 계속 이어갔으며, 특히 1818년(순조 18) 강진에서 해배(解配)되어 고향 마재로 귀환한 이듬해에 약암과 함께 문암 산장(文巖山莊)에 머물렀다.
여기서 문암 산장을 소개한다면 1787년(정조 11) 정약용이 정약전(丁若銓)과 동행(同行)해 구입한 별장(別莊)으로 알려져 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