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 생애 고찰(14)[강원경제신문-2026-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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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1795년(정조 19) 12월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던 정약용(丁若鏞)이 정조(正祖)의 부름을 다시 받아 무관직(武官職)인 용양위 부사직(龍驤衛副司直)을 시작으로 10개월이 지난 1796년(정조 20) 10월 규영부 교서(奎瀛府校書)로 자리를 옮겼다.
이와 관련해 규영부 교서(奎瀛府校書)의 역할은 당대(當代)의 문신(文臣)이자 학자(學者), 관료(官僚)들과 능력을 겨루며 온갖 서적(書籍)을 교정(校正)하고 임금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는데, 정약용은 이만수(李晩秀)를 비롯하여 이재학(李在學),이익진(李翼晋),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사기 영선(史記英選)을 교정했다.
그해 12월에 정조는 정약용을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제수(除授)하였으며, 이어서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겼다가 다시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陞進)하였다.
한편 정약용은 1797년(정조 21) 3월에 성균관 절제(成均館節製) 대독관(對讀官)에 제수되었는데, 절제(節製)란 절일제(節日製)의 준말로서 성균관 유생(儒生)에게 보이던 시험(試驗)으로 매년(每年) 인일(人日), 1월 7일), 상사(上巳), 3월 3일), 칠석(七夕), 7월 7일), 중양(重陽), 9월 9일)에 실시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명관(命官)이나 주문(主文)이 아니면 답안지(答案紙)를 채점(採點)하거나 가려 뽑는 대독관의 일을 할 수 없었으나 정조가 특별히 명을 내려 사암(俟菴)에게 많이 뽑으라고 하였다.
채점이 끝난 뒤 합하여 살펴보니 정약용이 뽑은 것이 3장이었는데 모두 윗자리를 차지하고 명관과 주문이 뽑은 것은 제4, 제5위를 차지하여 보는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두터워질수록 사암(俟菴)을 시기(猜忌)하는 반대파(反對派)들의 비난(非難)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었디.
이러한 상황에서 정약용은 6월 22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돼 승정원(承政院)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나, 사암은 마침내 결단(決斷)을 내려 동부승지의 벼슬에서 물러나겠다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구체적으로 그동안 자신이 천주교 신자(天主敎信者)라는 비난과 모함(謀陷)을 받았던 전말(顚末)을 자세히 기록하여 정조에게 올렸으니 이것이 바로 “변방사동부승지소(辯訪辭同副承旨疏)”인데 3000자가 넘는 명문(名文)이었다.
덧붙이면 정약용의 상소(上疏)는 자신이 받는 비난에 대한 생각과 벼슬을 사임(辭任)하는 내용이지만, 스스로 했던 일을 밝혀 비난에 대하여 해명하는 상소여서 자명소(自明疏)라고알려져 있다.
이러한 정약용의 상소가 올라간 이후 사암에 대한 비난 여론(與論)은 진정되었으나 근본적으로 정치적(政治的)인 이해 관계(利害關係)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상소 한 편으로 해결될 사안(事案)은 아니었으며, 결국 정조는 그 해 윤 6월 2일 정약용을 곡산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로 제수하였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